사회공헌 자료

<사회혁신 포커스 리뷰 9호> 돌봄과 통합, 유니버설 디자인


돌봄과 통합,
유니버설 디자인
신승수

㈜디자인그룹오즈 건축사사무소 대표

돌이켜보면 영주시 장애인복지관 설계를 시작했던 2013년 무렵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것 같다. 설계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차츰 ‘배리어 프리 디자인(Barrier Free Design)’이나 BF인증이 ‘물리적 장애물 제거’에 초점을 두는 데 반해, 유니버설 디자인은 물리적, 정서적 환경 모두에 초점을 둔, 보다 넓은 범위의 사용(use) 중심 디자인이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렇게 능동적인 입장을 지닌 유니버설 디자인의 시각에서 장애와 접근성 문제를 해석하고 계획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사용’과 ‘과정’ 중심의 유니버설 디자인

 

2017년에는 공동주택 유니버설 디자인 가이드 라인 연구를 위해 여러 아파트 단지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때 사회적 약자(장애인, 교통약자, 주거약자 등)를 위한 장애물 제거와 안전만 중시하는 융통성 없는 설계가 대부분 폐쇄적이고 수동적인 공간환경으로 귀결되는 부작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2018년에는 평창패럴림픽을 위해 준비했던 ‘민간시설 접근성 개선사업’의 결과물을 점주들과 방문자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관찰하면서, 모호한 의미의 ‘사용자’를 앞세우기보다 구체적인 사용 행위를 중심으로 계획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특히 평창, 강릉, 정선 지역 내 음식점과 숙박시설 256개소를 대상으로 장애인, 노약자, 외국인 등 모든 사람이 불편함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출입구와 이동통로, 화장실 등을 개선해 나갔던 ‘민간시설 접근성 개선사업’은 법규제와는 무관하게 온전히 유니버설 디자인의 측면에서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사업이었다. 따라서 ‘여러 상점이 공유하는 화장실’과 같이 개별 시설 단위를 넘어 장소 단위로 접근성을 확보하는 등 특정 조건과 상황에 맞는 창의적이고 융통성 있는 디자인 해법을 발견할 수 있었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장을 중심으로 마스터플랜을 조정하고, 성공사례를 축적하고, 관련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면서 의사소통 과정에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용’과 ‘과정’ 중심으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바라보게 되면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가치는 단순히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장된 접근과 참여를 통해 상호돌봄과 사회통합을 유도하는 것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하나의 보편적 기준보다 개조와 선택의 가능성

 

먼저 유니버설 디자인은 획일적인 기준 충족이 아니라 통합적인 공간환경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적설량이 많고 추운 지역에서 시행한 민간시설 접근성 개선사업에서는 결빙을 고려한 경사로의 경사도, 캐노피의 크기, 내·외부 공간의 깊이 등이 장소별로 달리 요구되었고, 업태와 업종에 따라 이동 동선의 편리성에 대한 기준도 제각기 달랐다.

 

지체 장애인을 기준으로 만든 넓은 폭의 화장실은 촉각으로 공간을 파악하는 시각 장애인에게 불편하고, 성인 기준의 장애인 손잡이는 장애 어린이가 움켜잡기 힘들다. 이렇듯 모든 장소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유일한 기준이 없으니, 휠체어를 타는 성인 지체 장애인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사용자를 만족시키도록 출입구의 폭이나 단차의 제거 같은 최소한의 물리적 기준만 강조되지만, 이 ‘대부분’이란 것도 장소와 상황, 그리고 생애주기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주거약자용 세대를 아파트 저층부에만 배치시키는 현행 법규는 장애인의 이동과 대피에는 편리할지 몰라도, 획일적인 지상층 풍경을 만들어 상호 교류와 만남의 가능성을 위축시킬 수 있으며, 공평한 접근과 사용이라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지향하는 목표는 상호돌봄 및 사회통합에 있는 만큼, 하나의 보편적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을 넘어 다양한 사용방식에 따라 언제나 개조할 수 있고, 자신에게 적합한 공간환경을 어디서나 선택할 수 있도록, 포괄적 의미의 접근성과 편의성 관점에서 선택의 다양성, 상황별 융통성 확보를 유니버설 디자인의 중심 과제로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법적 권리보장 및 관련 산업의 전략적 육성

 

둘째, 유니버설 디자인을 법적 권리보장과 함께 산업적으로 육성하고 진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초고령 사회에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 주택 개조와 관련된 제품 및 설비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것은 주거복지는 물론이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중요 과제다. 

 

주거실태조사에서 드러나듯, 노인 가구는 주택 만족도에 비해 주거환경 만족도가 높아 살던 곳에서 이웃과 함께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한다. 소위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aging in place)를 위해 현관이나 화장실에 손잡이를 설치하거나, 무단차 샤워부스를 만들거나, 높이조절 싱크대나 수납공간을 설치하는 등 주택 내부를 거주자의 필요에 맞게 개조하려는 요구가 증가하고 있지만, 이에 필요한 제품이나 설비를 찾기란 너무 어렵다. 더욱이 낙인효과 방지를 위해 심미적·문화적 수용성까지 고려한 다양한 가격대와 용도의 제품이 요구되지만, 유니버설 디자인 관련 산업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민간시설 접근성 개선사업에서도 가볍지만 튼튼한 이동식 경사로를 찾지 못해 고생했고, 흉물스러워 보이지 않는 도움벨이나 촉지도를 찾을 수 없어 직접 제작해야만 했다. 물리적 장애의 제거도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면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장애의 제거도 중요한 법이다. 인권과 의료·보건·복지 차원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고,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를 중심으로 주택개조 관련 산업을 육성·진흥하는 한편, 개조 비용에 대한 사회적 지원책 등을 다양한 측면에서 모색할 때다.

 

 

접근성과 방문가능성을 높인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

 

마지막으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건물 단위를 넘어서 근린 단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공공임대주택 유니버설 디자인 기반구축 및 설계지침 마련을 위해 시행된 2020년 관찰조사에 따르면, 이웃과의 교류 장소는 단지 출입구, 단지 주변 상가, 주민공동시설 출입구 등 주로 실내외 공간이 만나는 전이공간 혹은 놀이터 같이 여러 연령대가 이용하는 외부공간이지만, 이 시설 대부분이 가로나 오픈 스페이스에서 동떨어진 배면이나 외곽에 위치해 시인성과 접근성이 떨어지고, 유모차나 휠체어를 세워두거나 대기하는 여유 공간이 없으며, 시설들 사이의 연계성도 부족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더욱이 그 자체로 근린 규모인 수천 세대의 아파트 단지에서조차 무장애 놀이터 등 지역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장소를 단지 내부에 만든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웃 동네 아이들이 우리 단지 놀이터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주거침입죄 신고를 하는 웃픈 현실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의 접근성과 방문가능성(visitability)을 근린 단위에서 들여다보아야 할 때다. 발코니를 통한 사적 공간 확장과 피난 동선 확보 같은 건물 단위의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지역권 차원에서 주민공동시설과 오픈 스페이스를 연결하고 공유하여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는 만남과 교류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유니버설 디자인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근린 단위의 접근성과 방문 가능성 증대는 비단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콤팩트 시티, 건강 도시 등과 연결된 사회·경제적 문제다. 또한 ‘접근가능한 관광(Accessible Tourism)’ 개념에서 드러나듯 접근성은 관광지라는 개별 장소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통, 숙박, 식당 등 관광지를 중심으로 이들 장소 전체를 연결하는 공간 환경과 지역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특히 ‘한달살기’와 같이 관광과 거주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장소와 장소의 연결뿐 아니라 그 장소에서의 체류 시간과 교류의 밀도를 늘리는, 즉 통과(passing)보다 머무름(lingering)을 유도하는 근린 단위의 유니버설 디자인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돌봄과 통합의 공간이 된 영주시 장애인복지관

 

지금까지 유니버설 디자인과 관련된 여러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상호돌봄과 사회통합을 위한 ‘디자인’이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신중한 디자인’(careful design)이다. 그리고 모든 디자인에는 의도가 있으며 디자이너는 그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때로는 어떤 부분을 희생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다른 대안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자율과 자유가 없다면, 디자인을 통해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머무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지역사회를 잇는 관문이자 시민 모두의 공원을 만들겠다는 의도로 설계한 영주시 장애인복지관이 완공되고 한참 후, 영주시로부터 몇 장의 사진을 받았다. 2018년 6월 20일, 이날은 영주시 장애인복지관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던 날로, 많은 시민들이 경사진 공원에 모여 앉아 커다란 다리 밑에 마련된 무대에서 펼쳐지는 음악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사실 다리 구조물은 공원을 둘러싸는 길과 길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기도 했지만, 공원 아래에 건립된 장애인복지관과 체육관 출입구를 캐노피 형태로 덮어서, 비바람을 피해 전동휠체어 등 이동 보조기기를 놓아두거나 삼삼오오 자연스럽게 모여서 일상 정보를 주고받는 커다란 라운지 공간을 염두에 두고 계획한 것이다. 그 바람대로 이 장소는 통과의 공간이자 머무름의 공간으로 작동하면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편하게 방문하고 모여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장애인 접근성을 편의시설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계획하거나 법규를 쫓아 획일적이고 최소한의 방식으로 설계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를 연결하고 공원과 건축을 결합하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영주시 장애인복지관은 유니버설 디자인이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 목적은 사회적 만남과 통합의 공간,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서 상호돌봄이 보편화된 사회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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